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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한갑득 선생의 음악세계.....이보형 2006-01-11 14:52:11  
  이름 : 예술기획탑  (61.♡.66.161)  조회 : 7754    
故 한갑득 선생의 음악세계


絶世 거문고 산조 명인 한갑득

이 보 형(한국고음반연구회장)

I. 선생에 대한 추억

필자가 한갑득 명인에 대한 명성은 1960년대 초에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 무렵에 명동 국립극장 국악공연에서 심상건, 신쾌동 명인이 연주하는 것을 봤지만, 어찌 하여 그랬는지 한갑득 선생이 공연하는 것을 보지 못하여 항상 그의 풍모가 궁금하였다.
그러던 차에 비원 앞에 있었던 국립국악원에서 가졌던 정기 공연에서인가 어디에서인가 한갑득 선생의 연주하는 모습을 처음 보고,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가슴을 쳤다. 첫째는 신쾌동, 심상건을 두고 미루어 예상했던 것 보다 참 소박한 풍모를 지녔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런 풍모를 지니고도 커다란 거문고를 두고 어쩌면 그런 기막힌 예술성을 발휘하는 것인가 하는 찬탄이었다.
그 뒤에 여러 가지 모임에서 여러 차례 뵈었고 또 노는 자리에서 자진 사랑가를 부르는 것도 들었지만 선생은 평소에는 아무 표정이 없이 도통 말씀이 없으셔서, 아마 모르는 이는 한갑득 선생이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저렇게 사시는 분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 어른과 예술에 대한 담론을 하게 되면 단번에 알게 된다. 말씀이 여기에 미치게 되면 지금 까지 모습과 달리 눈에 불길이 번쩍이고 말씀이 비호와 같았다. 예술에 대한 그의 경륜을 토로하는 것을 듣게 되면 겉모습과 달리 속에 깊은 생각을 지니고 사시는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의 심지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오직 거문고에 실려 타니 그의 예술이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윽고 한갑득 선생의 댁을 찾아 간 일이 있었다. 의외로 선생은 삼각산 밑 달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한갑득 선생을 여러 차례 뵙고 말씀 들어 느끼는 것은 세상의 잡다한 일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시어 그런 산밑으로 이사하여 신선 같이 조용히 사시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한갑득 선생은 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많은 후계자를 길렀다. 제자들에 대한 애착 또한 대단하였다. 그는 평소에 말씀이 없지만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준엄한 평이 오고 갔다. 선생이 그가 타계할 무렵에 누구를 후계자로 인정하느냐 하는 질문에 선생은 이재화를 지목하였다. 오늘날 이재화가 한갑득 선생을 지극정성으로 챙기는 것을 볼 때 아마 이를 선생이 생전에 예견한 것이 아닌가 싶다.

II. 학습 과정

요즈음 젊은이들은 한갑득 선생 학습에 대하여 논할 때에 몇 가지를 놓치는 것 같다.
첫째, 한갑득 선생이 갑자기 뛰어난 음악성을 발휘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갑득 선생은 대대로 명인 명창이 배출된 국악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 수업을 하였다. 아마 아주 어려서 음악 수업을 하였기 때문에 선생 스스로도 어느 때에 학습을 시작하였는지 기억이 안 났을지도 모른다. 그런 예술환경 속에서 자랐으니 뒤에 발휘되는 대단한 음악성은 아주 어려서부터 터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한갑득 선생은 거문고만 학습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3세 이전에 안기옥에게 3~4년간 가야금산조 전판을 배웠다 하니, 그의 천재성을 두고 생각하면 박석기에게 거문고를 배우지 않고 가야금에 매진하였더라면 그는 필시 안기옥 가야금산조의 수제자로 기억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셋째는 한갑득 선생은 거문고산조만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 알려진 바와 같이 한갑득 선생은 박석기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웠다. 그러나 그의 회상에 의하면 13세에 옥과 창평 지곡리(지실) 박석기 재실에 들어가 처음 배운 것이 거문고로 다스름에서 풍류굿거리까지 줄풍류(현악영산회상) 전 바탕이었다 한다.
줄풍류 전 바탕을 떼고 배운 것이 거문고 가곡이라 한다. 우조 초수에서 시작하여 차례로 편락까지 배웠다 하니 거문고 가곡 전 바탕을 배운 셈이다. 그리고 나서 맨 나중에 배운 것이 거문고산조라는데 진양, 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자진자진모리 까지 떼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갑득 선생이 거저 거문고 대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더구나 그는 13세부터 19세여 까지 긴 세월을 배웠다 하니 얼마나 학습 연륜이 깊은 것인가? 넷째, 한갑득 선생이 60년대에야 국립국악원에 재직하면서 명인으로 이름이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갑득 선생은 악기옥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우고 나서 이내 천재 소년으로 이름이 났고 14세에 이미 일본에 초청되어 가서 가야금산조를 연주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석기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우고 20 세 이후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연주활동을 하면서 그의 명성은 세상을 흔든 것이다.
그가 그 당시 젊은 나이에 이미 거문고를 기막히게 탔다는 음향 자료가 있다. 오케판 심청가전집과 흥보가전집에서 반주 음악을 연주한 음반이 남아 있는데 지금 들어도 그것이 20대 소년의 연주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솜씨이다.

III. 신쾌동 선생과 대비되는 성격

거문고산조에도 여러 바디가 전승되었었지만, 오늘날 연주되는 것은 한갑득 거문고산조 바디와 신쾌동 거문고 산조 바디가 있어 이들이 거문고산조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런만큼 한갑득, 신쾌동 두 명인은 그 기량에서 두루 절세 거장이었지만, 한편 근대 거문고산조의 전승 발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도 같다.
그러나 두 거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어 이를 비교하게 되면 그들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즐거운 추억 거리가 된다. 두 명인은 우선 출생 환경부터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신쾌동 선생이 전라북도 익산군 삼기면 전형적인 농촌에서 태어나 향토 음악 환경에서 성장하였지만, 한갑득은 광주시 금남로 번화가에서 태어나 협율사가 무시로 드나드는 도시 음악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신쾌동 선생은 순박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반면에 한갑득 선생은 진 멋이 있고 감성적인 성품을 지니었다. 다 이것이 태어난 환경과 전혀 무관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쾌동 선생은 백낙준이 살었던 강경과 가까운 곳에 살았던 덕에 일찌기 백낙준 문하에 들어 거문고산조를 공부하여 백낙준-신쾌동으로 이어지는 전승계보를 이뤘다. 이에 견주어, 한갑득 선생은 백낙준의 제자 박석기가 광주에서 가까운 담양 창평에 살았던 덕에 창평 지실 박석기 재실에서 박석기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워 백낙준-박석기-한갑득으로 이어지는 전승계보를 이뤘다.
그러고 보면 신쾌동은 거문고산조 제2세대인데 견주어 한갑득은 거문고산조 제3세대라 할 수 있다. 제2세대와 제3세대가 차이가 뭐가 있으랴 하겠지만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전통사회에서 판소리 명창들이 그렇듯이 산조 명인들도 선생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명인이 된 뒤에는 여러 가지로 자기 의장대로 다시 구성하였던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거문고산조 또한 세대가 지나면 음악적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두 선생의 거문고산조가 다 같이 백낙준에게서 나왔다 할지라도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신쾌동 선생의 거문고산조와 한갑득 선생의 거문고산조를 비교하여 보면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갑득 선생이 천재적 창조성을 지니었다는 것을 두고 보면 한갑득 거문고 산조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IV. 빼어난 천재적 창조성

원광호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한갑득 선생이 어디 나가서 거문고 산조를 타게 되면 제자들이 선생을 따라 가서 그야말로 온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었다 한다. 왜냐 하면 만일 한갑득 선생이 어느 자리에서 앵기게 되면 튀어나오는 기막힌 가락을 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기막힌 가락이라는 것이 한갑득 선생 자신이 평소에 생각해둔 아끼고 아끼는 비장의 가락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타는 자리에서 흥이라도 나게 되면 전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가락이 튀어나와 주위 사람을 혼절하게 만드는 일이 더러 있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한갑득 선생 자신도 예상치 못한 가락이 나오는 것이라 그 즉시 챙겨 듣지 않으면 영 다시는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런 가락이 매번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다. 어느 때는 아주 평범한 가락으로 일관하여 뒤에 선생에게 그 연유를 물으면 시큰둥한 대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보물을 물어줘도 모르는 것들 앞에서 땀 뺄 것이 무엇이여? 공연히 헛일이지"
선생이 공연장에서 앵기게 되는 조건의 하나가 가락의 진가를 아는 귀명창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귀명창들이 늘어섰다 할 지라도 흥이 나지 않으면 앵기지 않는 법, 즉 공연장 분위기와 선생 자신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아는 이들이 슬쩍 선생이 좋아하는 술을 대령하여 약간 거나하게 흥을 돋구는 일이 필요하였다 한다. 이는 당나라 시인 왕발이 글을 짓게 되면 직전에 먼저 술을 들고 한 숨 잔 뒤에 이내 일어나 쓴 것이 천하 명문들이었다 하는 것과 통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한갑득 선생이 그렇게 튀어 나온 가락은 후인이 다 챙겼을까? 아마 허공으로 날아 간 뒤에 종적을 알 수 없는 것들이 허다 할 것이다. 생육신 김시습이 동자를 대동하고 시내를 따라 가며 나무 잎에 시를 지어 냇물에 띄어 보낸 시가 수도 없이 많지만 후인들은 그 시를 알지 못하였다 한다. 앞에서 한갑득 선생이 앵겨서 튀어나온 가락 가운데는 다시 듣지 못 한 것들이 있다 하였듯이 선생 스스로도 챙기지 못한 보물 같은 가락들이 얼마나 있었을꼬?
2002-11-28 12: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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